쑤욱!
주인공은 항아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항아리 속에서 나옵니다. 마치 항아리에서 태어난 것 같은 모습이네요. 이상하죠? 그런데 더욱 이상한 점은 이겁니다. 왜 망치로 항아리를 부수지 않죠? 정상을 올라가는 것이 목표라면, 항아리를 부수고 걸어 나와 각종 장애물들을 넘고 산을 오르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주인공은 끝까지, 항아리에 갇힌 채로, 망치를 휘두르며 힘든 여정을 이어나갑니다.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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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정을 시작하는 항아리맨 |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주인공이 항아리를 부술 수 없다면? 항아리 안에서 망치를 잡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라면? 그렇다면 얘기가 좀 달라질까요? 일단 ‘항아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주인공이 왜 항아리를 부술 수 없는지도 고민해봅시다. 항아리의 의미에 대해 분석하려면, 먼저 철학적으로 ‘개인’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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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 |
‘개인’ 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개인이라는 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과거와 꿈, 그리고 육체를 가진 세계 속에 내던져진 존재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개인은 모두 그 개인만의 특별한 세계와 우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만의 세계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해봅시다. 여러분은 누구인가요? 어느 학교 몇 학년, 어느 직장의 어느 지위에 있는 누구. 누구의 무뚝뚝한 몇 번째 딸, 몇 번 버스 몇 번째 좌석에 탑승한 승객... 여러 가지 답변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답변들을 잘 살펴봅시다. 결국 우리가 흔히 내리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변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즉 우리의 세계는 타인의 세계, 혹은 다른 사물의 세계와 관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세계들은 맞부딪히면서 확장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합니다. 그런 확장과 변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자아를 구현해 나가는 것이죠.
자, 그럼 이제 ‘항아리’ 가 무엇인지, 항아리에서 나온 남자는 누구인지 감이 좀 오시나요? ‘항아리’는 결국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본인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항아리를 깰 수 없습니다. 항아리가 곧 ‘자신’ 이니까요. 하지만 주인공이 세상과 관계하고, 본인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항아리에서 나와야겠죠. 주인공은 비로소 고개를 들고 세상과 마주합니다. 자신이 던져진 세상을. 자아실현을 위해 관계해야 할, 또는 극복해야(Getting Over) 할 세상을.
그의 손에는 망치가 들려 있습니다. 망치는 무엇일까요?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매개체. 즉, 우리의 신체입니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신체를 이해함으로써 타인과 세계를 이해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신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며, 나와 세계가 상호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즉, 우리는 망치(우리의 신체)를 매개체로 하여 항아리(우리의 세계)에 속한 채로 게임을 클리어(자아를 실현)해야 합니다.
물론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는, 때로는 세상이 원하는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죠.
안착할 곳이 없어 설산에서 미끄러지기도 하고

뜻하지 않는 곳에 걸려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추락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원치 않는 방향으로 세상과 부딪혀 생긴 타박상을 ‘고통’이라고 부르고는 합니다. 그렇기에 <Getting Over it>에서 우리가 계속 원치 않는 방향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자아실현을 하는 과정 역시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이 망할 항아리’를 깨부수고 편하게 두 다리로 걸어 올라가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삶이 타인이나 사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고 해도, 자아실현, 즉 자신이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거추장스러운 자신의 우주를 짊어지고 세상과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난관에 굴복해서 항아리를 깨버린다면, 자신의 우주를 거부하고 세상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간다면, 그것은 본인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이겠지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게임은 고통스럽습니다. 교묘한 스테이지 디자인은 우리에게 희망을 품게 만들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추락을 유발하는 실수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하다 보면 ‘내가 이것을 왜 하고 있지’ 라는 생각도 들고, 망치를 휘두르는 저 남자가 괜히 원망스럽고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사실 그런 생각이 들면 우리는 그저 게임을 멈추면 됩니다. 게임이니까요. 게임을 멈춘다고 해서 우리 삶에 큰 변화가 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삶은 게임처럼 그렇게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 역시 필연적으로 항아리 속에 갇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정상을 향해 망치를 휘두르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고통스럽겠죠. 어쩌면 ‘태초마을’(게임을 처음 시작하는 부분) 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개발자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게임을 디자인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개발자 Bennet Fordy는 게임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I created this game for a certain kind of person to hurt them."
나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이 게임을 만들었다. 대체 특정한 사람들이 누굴까요? 이 게임을 방송하는 인터넷 방송인? 어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 친구랑 이 게임을 가지고 내기를 한 사람? 사실 이 모두가 될 수 있지만, 저는 Bennet Fordy가 한 마디로 요약해 "정상까지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게임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상까지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 사실 굉장히 의지를 많이 필요로 하고 어려운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모두 해내고 있는 일이죠. 자아를 실현해내기 위해, 세상과 이리저리 부딪히고 떨어지는 일.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항아리를 짊어지고 옵, 옵, 소리를 내며 우리만의 항아리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게임은 우리는 모두 고통 받고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정말이지 처절하게 확인시켜 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달콤한 보상 속에 좌절감을 교묘히 숨겨 놓는 다른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접근 방식이죠.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익숙하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달콤한 케잌 밑에 좌절감을 교묘히 숨겨 놓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게임은 더욱 짜증납니다. 하지만 이런 낯선 경험을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네요. 결국 모든 게임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우리 삶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랑 비슷하고, 낯설게 다가오는 경험은 게임 자체에 대한 생각, 나아가서는 삶의 과정에 대한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니까요.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도 잘 생각해보면, 분노에 휩싸여서 "XX, 이게 게임이야?" 라고 질문했던 것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계속 떨어지고, 미끄러지고, 책상을 여러 번 쾅쾅 치면서) 게임의 의미, 게임의 본질, 고통의 의미 등을 생각하다 보니 결국은 삶이란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그래도 개발자가 그 수많은 역경을 견뎌내고 정상에 오른 사람들에게마저 무심하지는 않습니다. 자세한 것은 직접 엔딩을 보면서 느끼시기 바랍니다 ^^. 아무튼 항아리 게임에서도, 게임 밖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는 자아의 세계에서도 다들 'Getting Over It' 해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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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저 높은 곳으로 날아갈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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