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시맨>. 늙어버린
갱스터들의 이야기. 한창 때의 갱스터들 이야기를 다루는 다른 누아르 영화들과 다르게, <아이리쉬맨>은 한 갱스터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그가 젊어서
갱스터가 된 계기부터 홀로 쓸쓸히 늙어 죽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아이리쉬맨>에서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죽음을 드러낸다. 잠깐 지나가는
갱단의 일원이나 혹은 심부름꾼 역할을 하는 인물까지. 해당 인물이 등장하면 해당 인물의 이름 밑에 (19xx년 머리에 총격을 8번 맞고 사망.) 등으로 인물의 죽음이 같이 알려진다. 사실상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이미 죽은 채 등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인물의 죽음은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니다. 다른 누아르 영화에서는 누가 죽고 누가 죽이느냐가
서사의 큰 변곡점을 만들어내는 데에 비해, <아이리시맨>에서
인물의 죽음은 단지 예견된 결말일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수많은 인물들이 죽어나가지만, 그 죽음들은 전혀 드라마를 만들어내거나
기존의 드라마를 바꾸지 않는다. 그 죽음들은 단지 ‘프랭크
시런’이라는 인물의 삶 속 지나가는 한 부분들일 뿐이다. 버팔리노
패밀리의 암살자 프랭크 시런의 삶은 수많은 죽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 수많은 죽음들을 극대화하지도, 그렇다고 추모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히 지나가듯 보여줄 뿐이다. 심지어는 서사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던 러셀이나, 지미 호파도 죽는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 역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주인공의 삶을 덤덤히 지나간다.
결국
시런의 곁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죽거나 그를 떠나간다. 시런은 양로원 의자에 홀로 앉아 조용히 죽음을
기다린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수많은 죽음과 마주한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암살자였던 프랭크 시런은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수의
죽음을 마주했을 뿐이다. 양로원 의자에 앉아 있는 시런은 그 수많은 죽음들을 거치고, 이제 단 하나의 죽음만을 남겨놓은 상태다. 자신의 죽음이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놓은 채 잠든 프랭크 시런의 죽음은, 또 누군가가
마주할 죽음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이리시맨>은 수많은 죽음들을 보여줌으로써,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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